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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진정한 종결자, 왜 포르미니 전투는 잊혔는가? 본문
서론: 아쟁쿠르의 영광, 그 후 35년
백년전쟁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를 떠올립니다. 진흙탕 속에서 헨리 5세가 이끈 소수의 잉글랜드 장궁병(Longbowman)들이 프랑스의 막강한 중무장 기사 군단을 학살한 기적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군사사의 정점이자 장궁의 위력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5년 뒤, 아쟁쿠르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또 다른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포르미니에서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1450년의 포르미니 전투는 아쟁쿠르만큼 극적이지도,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백년전쟁의 실질적인 종결을 알리고, 중세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설적인 장궁의 시대가 어떻게 새로운 기술의 상징인 '대포' 앞에서 무너져 내렸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마지막 장궁병들에게 바치는 기록입니다.
몰락하는 사자 왕국: 백년전쟁의 황혼
아쟁쿠르의 영웅 헨리 5세가 사망한 이후,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영토는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프랑스는 국가적 자긍심을 되찾았고, 잉글랜드는 내부적으로 귀족들 간의 갈등이 심화하며 '장미 전쟁'이라는 내전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국력은 소모적인 전쟁으로 쇠퇴하고 있었고, 프랑스에 주둔한 군대의 사기와 보급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1444년, 양국은 잠시 휴전(투르 휴전)했지만, 이는 프랑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군사 시스템을 뿌리부터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는 이 휴전 기간 동안 내부 분열만 거듭했습니다. 아쟁쿠르의 영광은 이제 빛바랜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고, 전장의 균형추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남긴 유산: 프랑스의 강철 군대
샤를 7세가 단행한 군제 개혁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봉건 귀족에게 의존하던 기존의 군대를 해체하고 왕에게 직접 충성하는 상비군, 즉 '칙령 군대(Compagnies d'ordonnance)'를 창설한 것입니다. 이들은 꾸준히 훈련받고 급료를 지급받는 전문 군인이었으며, 이전의 오합지졸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보유했습니다. 둘째, 기술 혁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장-피에르 뷔로 형제가 이끈 포병 부대의 창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야전 포병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과거의 공성용 대포와 달리, 이들이 개발한 대포(culverin)는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나 야전에서 보병과 기병을 직접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더 이상 잉글랜드 장궁병의 화살비를 무기력하게 맞고만 있던 과거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과 방패를 모두 손에 쥔 강철 군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마지막 원정군: 토머스 키리엘 경의 임무
1449년 휴전이 깨지자, 개혁된 프랑스군은 무서운 속도로 노르망디 지역의 잉글랜드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잉글랜드 왕실은 노르망디를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정예 병력을 긁어모아 원정군을 파견했습니다. 이 군대를 이끈 지휘관이 바로 백전노장 토머스 키리엘(Sir Thomas Kyriell) 경이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약 3,000명 남짓한 소규모였지만, 그 구성원들은 아쟁쿠르의 신화를 계승하는 베테랑 장궁병들이 주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장궁이 세계 최강의 무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키리엘과 그의 병사들은 프랑스군이 점령한 노르망디의 바이외(Bayeux)를 탈환하고 전세를 뒤집으라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프랑스 땅에 상륙했습니다. 이것은 몰락하는 왕국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망치와 모루: 두 개의 군대가 다가오다
키리엘의 상륙 소식을 접한 프랑스는 즉각 대응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잉글랜드군을 분쇄하기 위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준비했습니다. 클레르몽 백작(Comte de Clermont)이 이끄는 약 3,000명의 프랑스군이 동쪽에서 키리엘의 진군을 가로막아 '모루' 역할을 맡았습니다. 동시에, 프랑스 총사령관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Arthur de Richemont)이 이끄는 2,000명의 브르타뉴 기병대가 남쪽에서부터 빠르게 북상하여 잉글랜드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강타하는 '망치'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자신들이 두 개의 프랑스 군대 사이에 갇힐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클레르몽의 군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1450년 4월 15일, 키리엘의 군대는 포르미니라는 작은 마을 근처의 개울가에서 클레르몽의 프랑스군과 마주쳤습니다.
장궁병의 방어 진지: 또 한 번의 아쟁쿠르를 꿈꾸며
키리엘은 전투가 임박하자 교과서적인 잉글랜드식 방어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개울을 등지고 과수원과 정원이 있는 유리한 지형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군대 핵심인 장궁병들은 전면에 나서서,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상징과도 같은 뾰족한 나무 말뚝을 땅에 박기 시작했습니다.
진형은 완벽했습니다. 좌우익에 배치된 장궁병들이 'V'자 형태로 화살의 살상 지대를 만들고, 중앙의 중보병들이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하는, 수십 년간 프랑스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바로 그 진형이었습니다. 키리엘과 그의 병사들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프랑스군이 이전처럼 무모하게 기병 돌격을 감행한다면, 이곳 포르미니는 제2의 아쟁쿠르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전장에 울린 새로운 소리: 대포의 등장
전투가 시작되자, 클레르몽의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몇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맹렬한 화살비에 막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습니다. 상황은 잉글랜드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바로 그때, 클레르몽은 이전의 프랑스 지휘관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무모한 돌격을 중지시키고, 후방에 있던 두 문의 대포(culverin)를 전장으로 끌고 왔습니다.
곧이어 전장에 단 한 번도 울려 퍼진 적 없는 굉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무쇠 포탄이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대열 한가운데로 날아와 흙먼지와 비명을 일으키며 사람의 몸을 찢어발겼습니다. 장궁병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화살은 대포에 닿지 않았고, 그들이 믿었던 나무 말뚝은 포탄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수십 년간 전장을 지배했던 그들의 전술이,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 앞에서 무력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궁수들의 분노: 대포를 향한 필사적인 돌격
수십 년간 전장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이 새로운 무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분노와 자존심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전술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바로 자신들의 강력한 방어 진지를 버리고, 성난 함성을 지르며 언덕을 달려 내려가 프랑스 포병 진지를 향해 돌격한 것입니다.
이 돌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소수의 포병들은 백병전에 능한 장궁병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두 문의 대포는 순식간에 잉글랜드군에게 탈취당했습니다. 잠시나마 잉글랜드군은 승리를 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재앙의 서막이었습니다. 그들은 대포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방어 진형을 무너뜨렸고, 이제 평지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브르타뉴의 폭풍: 리슈몽의 기병대가 당도하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잉글랜드군이 대포를 탈취하고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타, 수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어났습니다. '망치' 역할을 맡았던 리슈몽의 브르타뉴 기병대가 마침내 전장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들은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그대로 강타했습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정면에서는 클레르몽의 주력 부대와, 측면에서는 리슈몽의 기병대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방어 진지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흩어진 장궁병들은 밀려드는 기병대의 창칼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전장은 순식간에 일방적인 학살의 장으로 변했습니다.
잉글랜드 사자(獅子)의 죽음: 노르망디의 대학살
전투는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학살이었습니다. 방어 진형 속에서 치명적인 화살비를 퍼붓던 장궁병들은, 일단 대열이 무너지고 백병전 상황에 놓이자 중무장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었습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 끝에, 토머스 키리엘을 포함한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고, 잉글랜드군은 2,5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미미했습니다.
포르미니의 들판은 한때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했던 잉글랜드 사자 군단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가 프랑스 땅에 보낼 수 있었던 마지막 정예 원정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이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잉글랜드의 대륙 지배 야망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왜 포르미니는 전환점이었나: 장궁 시대의 종말
포르미니 전투는 백년전쟁, 나아가 서양 전쟁사 전체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첫째, 이 전투는 야전에서 포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초의 주요 전투였습니다. 프랑스의 대포는 잉글랜드의 검증된 전술을 무력화시키고, 승리의 결정적인 변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기사와 장궁병이 지배하던 중세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화약 무기가 전장의 주역이 되는 근대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둘째,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지배를 완전히 끝장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원정군이 전멸하자, 노르망디의 남은 잉글랜드 요새들은 저항할 힘을 잃고 차례로 프랑스에 항복했습니다. 셋째, 이 전투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잉글랜드 육군의 신화를 깨뜨렸습니다. 아쟁쿠르의 승리는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포르미니는 잉글랜드에게는 악몽이었고, 프랑스에게는 백년전쟁 승리의 서곡이었습니다.
결론: 기술이 역사를 바꾼 날
포르미니 전투는 거대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장궁병들은 자신들이 평생 연마해온 기술과 전술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전장에 섰지만, 시대의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그들의 용기는 새로운 기술의 힘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전투는 한 국가의 승리와 다른 국가의 패배를 넘어, 하나의 시대가 어떻게 막을 내리는지를 보여줍니다. 포르미니의 이름 없는 장궁병들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위대한 영웅의 이름만이 아니라, 때로는 이름 없는 이들의 손에 들린 낡은 무기와 그들을 겨눈 새로운 무기의 차이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Q&A
- Q. 포르미니 전투는 백년전쟁에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 A. 잉글랜드의 마지막 정예군을 전멸시켜 노르망디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확립했고, 백년전쟁의 종결을 사실상 결정지은 전투입니다.
- Q. 이 전투가 아쟁쿠르 전투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 A. 아쟁쿠르에서는 잉글랜드 장궁병이 프랑스 기병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지만, 포르미니에서는 프랑스의 신무기인 대포와 분할-협공 전술 앞에 장궁병이 무력하게 패배했습니다.
- Q. 대포는 전투에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까?
- A. 프랑스 대포는 잉글랜드의 강력한 장궁병 방어 진지를 원거리에서 무너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장궁병들은 방어 진지를 버리고 돌격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전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Q. 포르미니 전투가 '중세 전쟁의 종말'을 상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A. 기사와 장궁병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상징적인 병과가, 화약 무기(대포)와 전문화된 상비군이라는 근대적 군사 시스템 앞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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